예사노바 타미르 애프터스토리 / 편지

더보기

친애하는 이즐린 빈트 타누크 씨에게

몸은 건강하신가요, 이즐린 씨.

제가 그곳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오랜시간이 지났습니다.

여러분을 떠나보내고 돌아온 고향은 꽤나 변화를 보였습니다.

사막세계의 삼 년이 이곳에선 십오 년이란 세월로 변모하더군요.

계절이 돌고돌아 저는 팔십이라는 나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인어의 생 중 팔십 년이라는 기간은 특출나게 긴 편은 아니지만,

인간에게는 인생을 뒤흔들 커다란 수라 그 간극에 매번 초조함을 느낍니다.

당신의 발걸음이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기 전

한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에 중앙에서 온 아카데미 교수 제안을 승락했습니다.

그곳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도를 해볼 수 있겠지요.

당신이 제게 준 물건이 공간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것 혹 알고 계셨나요?

이정표를 따라 절반의 항해를 마쳐 이제는 고지를 넘는 일만 남았습니다.

목표는 사막과 바다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구전에 나오는 마술사들과는 달리 세상의 윤리와 도덕에 맞게 지식을 추구하고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말아주세요.

...

그렇지만 가끔 미련이 제 곁을 맴돕니다.

만약 그때 저도 같이 돌아갔으면 어떠했을까...

만약이란 단어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그저 상상하는 것에 불과하지요.

아마 저는 같은 행동을 똑같이 반복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제 마음을 뺏기는 것 역시 반복했겠지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당신이 리안을 등쳐먹을 사기꾼인 줄 알았습니다.

의심하고 견제하고 떠보고 그랬었는데 말이죠...

고난과 역경 그 안에서 나눈 대화.

저는 당신을 이해(공감)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간절히 구하겠다는 마음 말입니다.

저 역시 리안을, 나나이 형님을, 우리가 살아가는 두 개의 세계를 간절히 구하고자 했으니까요.

이해(공감)가 곧 연심이 되어 제 가슴을 간지럽혔습니다.

마지막, 당신에게 했던 행동에

지금의 전 한점 부끄럼도 가지지 않습니다.

꿈속에서나마 다시금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타미르 카심 올림

***

손에 든 편지를 다시 고이 접어 첫번째 서랍 안쪽에 넣었다.

벌써 쌓이고 쌓인 편지지만 쓰는 걸 멈추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형님, 리안, 이즐린. 제가 곧 가겠습니다.

***

예사노바 이즐린 애프터스토리 / 답문

더보기

제 xx대 하자르 x년 x월 x일, 
태양이 그 모습을 가리면 악마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예언하여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다.

x년 x월 x일, 사막왕이 대신관과 근위대장 이하 ◼︎◼︎인을 대동하여 유적으로 향하다.

x년 x월 x일, 온 하늘에 균열이 생기며 그 틈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다.

x년 x월 x일, 사막왕의 배가 귀환하다. 사막왕이 그릇을 깨는 자를 봉인하였다고 말하다. 바람잡이의 역할을 하던 방랑자가 사라짐을 안타까워하다. 우주의 끝에 있었다는 물로 이루어진 사막을 바다라 부르다.


———


  행여 획 하나를 놓칠까 점토판의 요철 하나를 놓치지 않고 훑어내려가던 대신관의 손끝에서 힘이 빠지고는 이윽고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바다가 있는 세계에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방도는 없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지도. 다시 만날 방법을 찾기 전에, 떨어져 있는 동안 누구 하나의 시간이 멈추고 만다면. 일각이라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마지막 일식 이래로 푸른 바다가 있던 세계를 꿈꾸지 않고 살아온 때는 한 순간도 없다.

  신관의 책무를 차마 저버릴 수 없어 뱃머리를 돌려 원래 세계로 돌아온 밤, 그날 처음 만난 바람잡이를 떠나보낸 일을 떠올리고 쌓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터진 눈물을 삼키느라 수 일.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어찌 보면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가 이 세계로 떨어졌다는 3년 전의 기록을 시작으로 왕국 도서관의 서가는 물론이요 거리의 소문과 구전으로 내려오는 노래까지도 모아 바다에 대한 단서를 찾아다니기를 꼬박 십 년하고도 수 개월. 
  그 작은 부산물로 그가 주석을 달고 정리하여 펴낸 역법서와 역사서가 서가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천구의, 그릇을 인 거북 두 마리와 고래의 조각이 놓여 있는 무게감 있는 석제 탁자를, 왕국의 특이한 사건을 모았다는 야담집, 신화 시대부터 거의 모든 역사를 망라하는 석판부터 양피지 두루마리, 종이책까지에 쓰인 기록들이 어지럽게 놓여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리고 있었다.

 왕국에서 손에 꼽던 바람잡이. 왕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사제로 길러지며 살던 자에게 동경의 존재. 신뢰받지 못해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건만 무엇 때문에 내가 노래할 자격이 된다며 도움의 손길을 주겠다고 하게 되었는지. 내게 가졌던 알려 줄 수 없는 감정이라니. 왜 떠날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을까. 대체 그 마지막 인사가 뭐라고.

  차라리 애초부터 선왕을 따라가 봉인 의식을 일찌감치 마쳐 버렸다면 타미르는 너른모래땅의 주민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혹여나 큰 일식이 다시 일어나 두 세계의 경계가 또 찢어진다면. …혹시나 그릇을 깨는 자가…….
무슨 몰염치하고 불경한 마음을 품는가, 생각을 바로잡으며 다시 기록을 읽으려고 하던 때,

  -실례합니다, 대신관님.
 
 누군가가 방문을 청한다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 하세요, 라는 말을 신호삼아 육중한 돌문이 안쪽으로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알현을 청했던 이가 집무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목덜미 위까지 오는 금발의, 지금은 신입 티를 완연히 벗은 사제가 이즐린에게 목례로 인사하고는 종이 묶음 수 권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장 위의 것을 넘겨주었다.

-고맙습니다, 수고가 많으셨어요.
  사제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받아든 서류를 넘겨 첫 줄부터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학자들에게 협력을 구해 받고 있는, 왕국 안팎에서 일어나는 기현상에 대한 보고서다. 몇 장을 넘길 때쯤 금발의 사제가 운을 떼었다.

-주제넘을지 모르나, 그…….
-말씀하세요.
-대신관님께서 천체의 운행이며 왕국사…그 밖에도 말이죠, 이런저런 연구에 투신하기 시작한 것이요.
-역시 유적에 다녀오신 이래로 그리 되신 것이 아닌지…했습니다.

-10년 전의…, 그렇죠, 기억하고 있네요. 그대에게도 큰 사건이었죠?
-주교님께 듣고서 얼마나 놀랐는지는 아시나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시고 그대로 신전에 들어오시는 대담함이라니.
-미안합니다, 그 때는. 그래도 그곳에서 저희를 맞은 게 당신이라 다행이네요. 태양신의 가호라도 있었던 것 아닌지.

오랜만의 기억에 가볍게 웃으며 이즐린은 다시금 시선을 보고서로 향했다.

-그리고 외람되오나…밤이 늦었습니다. 몸이 상하실까 염려되니…, 그, 오늘만은 잠깐 휴식하심이 옳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결국 걱정을 끼치고 말았습니까,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이 사람이 쓰러지지는 않아요.

계속 보고서를 읽어내려가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최근 수 개월간 왕국 북동부에서 허공에 푸른빛의 작은 창문 같은 것이 생겼다 사라졌다는 뱃사람들의 보고가 있었음.
-대부분 생전 처음 맡아 보는 소금기 섞인 냄새가 나는 바람이 불었다고 증언함. 차원 균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
-하지만 그 양상과 관측되는 마법으로 보아 그릇을 깨는 자의 소행이라고 보기는 힘듦.
-빠르면 5년 후에 해당 지역에 사람이 드나들 규모의 문이 생길 것으로 예측됨.

설마.
당신의 바람이 만들어낸 길일까.
 종이 묶음을 들고 있던, 흥분으로 떨리던 손을 간신히 고쳐잡았다. 오늘만은 잠깐 쉬라고 한 이유가 있었군. 언젠가 때가 되면 이 자리를 물려줘도…괜찮겠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생각을 추스르고는 픽 웃음을 흘리며 목제 테와 수정으로 된 안경을 벗어 찰칵 소리가 나게 접으며 화답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할까요.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평안한 밤 되시길.
고개를 숙여 물러가는 사제에게 같은 말로 답하고서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즐린은 몰려드는 감정에 균형을 잃고 탁자에 두 팔을 짚었다.

앞으로 5년이라.
할 일이 많다.
기껏 당신이 만들어낸 길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가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쌓이고 쌓여 산을 이루었다. 몇 날 며칠을 걸려 이야기해도 모자라겠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보냈는지. 한켠에 쌓인 일기와 보내지 못한 편지를 보며 생각했다.
 
 다시 만나면 가장 먼저 전해야겠지.
당신의 은인이자 형제가, 귀여운 후배가,
…그리고 당신을 동경하던 자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부디 그대 역시 나와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기를.
그 때는 내가 당신에게 가진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를.

———

이하 로그에는 못쓴 뒷설정:

-이즐린이 집필한 역사서에는 직접 그린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 인어 그림을 특히 신경썼는데, 언젠가 타미르가 이걸 볼 때 자길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반지는 결재할 때 인장으로 쓰는 것인데(그래서 태양신의 권위...어쩌구...), 대마다 다른 디자인이며 평생 한 가지 모양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라서 돌아오고 나서 같은 것 하나를 더 맞추었음. (분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다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으니 재량으로 똑같은 거 하나 더 만들었다든가…)
-인장 반지를 다시 만들 때 장인에게 다른 반지 하나를 더 주문했는데, 자수정이 박힌 은반지였다고 함.
-대신관은 사관과 천문관, 태양신을 모시는 경우 현실로 치면 물리해양학자…같은 위치를 겸하고 있지 않을까.
-이즐린이 처음에 보던 기록은 오래 전의 비슷한 사건입니다. 일행 얘기 아님.
-사막에서 관측된다던 현상은 타미르의 연구 도중 일어나는 일이 이렇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날조했습니다 미안해요… 뱃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