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이내에 쓴 글은 얼마 없어서 정리해서 올립니다.
전연령 파트만 잘랐습니다.
<사막의 어린 신랑>에서 발췌
#1.
미오리네는 기분이 좋지 않다. 원하지 않은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이니까.
나이가 찼음에도 결혼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건 제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가문사람들은 결혼이 최고라며 미오리네에게 여러 신랑 소식을 들고 오기 일쑤였다.
한 열둘 정도를 거절했을 즈음,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일과 결혼 둘 다 진행하면 되지 않겠느냐 데릴사위를 데려오기로 했다.
미오리네는 조건을 붙였다.
첫 번째, 여러 마을을 통틀어서 가장 사냥을 잘하는 사람일 것.
두 번째, 가정에 충실한 사람일 것.
세 번째, 나보다 나이가 적을 것.
네 번째, 예의가 바르다 소문이 날 것.
다섯 번째, 내 옆에 설 정도로 반반한 얼굴일 것.
사냥을 제일 잘하는 자가 자신보다 나이가 적을 리도 없고, 가정일에 충실한 일도 없다. 자신만만한 제타크 가문의 첫째처럼 재수도 예의도 없겠지.
한숨을 내쉬며 예식에 쓸 의복을 몸에 걸쳤다.
“설마 이 조건에 맞는 녀석이 있을 줄이야...”
미오리네의 조건에 맞는 자.
붉은 머리 가문의 막내라고 했던가? 나이는 한두 살 정도로 어리겠지. 그 정도도 충분히 어린 편이다. 스물의 미오리네는 연하의 데릴사위를 구슬릴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창문 너머로 붉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 여럿이 보였다. 그 중 제 또래로 보이는 건장한 여자가 하나. 시종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보통 시종으로 저렇게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던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오늘 밤에나 볼 얼굴이다. 그때까지는 신랑이나 신부 둘 다 천에 가려져 모습을 볼 수도 없으니까.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밤이 되었다. 신부가 있는 방에 들어가 걸친 천을 벗기는 게 결혼의 마지막. 원래라면 신부인 내가 천을 쓰고 있어야 했지만 데릴사위 쪽이 천을 뒤집어쓰고 기다리기로 했다. 워낙 내가 지랄을 쳐 해댔으니 이렇게 해둔 거겠지.
몇 개의 촛불로 밝힌 신혼방으로 미오리네는 들어갔다. 하나의 이불 위에 화려한 천에 싸인 신랑이 보인다.
오늘 아침의 짧은 붉은 머리의 여성. 분명 그 사람이겠지. 허우대도 그 정도면 합격이다. 미오리네는 단번에 천을 걷어냈다. 그러자, 그 안에는 붉은 머리는 맞지만 짧은 머리가 아닌 그의 어린 시종이 얼굴을 드러냈다.
미오리네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바람을 맞히다니...!”
망할!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천을 집어 던지고 뛰쳐나가려 하자 아이가 제 손목을 붙잡았다.
“시, 신부님! 바람 안 맞혔어요! 제가 신랑이에요!”
다급한 아이의 목소리는 그 나이대에 맞게 어리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이런 아이가 어떻게 제가 건 조건에 맞는 신랑이란 말인가?
“...네 언니 대신 말이야?”
“네...? 언네는 여기서 왜?”
어리둥절한 얼굴. 정말이지 바보 같은 얼빵한 얼굴이다.
“내가 건 조건, 그건 너 같은 어린아이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가장 사냥은 잘하면서 가정에 충실하고 예의바르고 반반한 연하. 자기 또래여서 말도 안 되는 데 이런 조그만 아이가 될 수 있을 리가.
“저, 저 맞아요! 미오리네 씨의 신랑 말이에요! 제가 틀림이 없어요!”
데릴사위인 붉은 머리 꼬마는 한 치의 거짓 없는 눈빛을 보내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거야?
미오리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중얼댔다.
“이게 도대체...”
<엄마의 자리>에서 발췌
#1.
세상이란 선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의 망할 아버지 렘블랑은 사람을 소모품으로 보는 인간이었다. 많은 자들을 전장으로 몰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그 탓에 많은 자들에게 원한을 샀고. 결국 이 사단이 나버렸다.
링거줄이 강제로 빠진 탓에 소매가 붉게 물들었다. 배려 없는 손속에 이리 매달렸다 저리 매달렸다 마구잡이로 흔들리다 이내 어두컴컴한 곳으로 몸을 우겨넣어졌다. 배기음이 들린다. 트렁크임이 틀림없다.
눈과 입, 사지 모두 온전치 못했다. 얼마나 단단하게 묶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리고 얼얼했다. 이번에야말로 죽는 걸까? 이미 수차례 납치당해 인질로 넘겨지길 여럿. 이제는 진저리가 났다. 그런다고 망할 아버지가 꿈쩍이라도 할까.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엄마가 죽었을 때도 찾아오지도 않은 비정한 사람. 분명 이번에도 똑같을 거다.
끼이익! 덜컹-!
갑작스레 공간이 흔들렸다. 뭐라도 걸린 것일까? 차체가 이리저리 세게 진동하는 바람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얻어맞았다. 부러지고 부어오르는 통증에도 비명 하나 지르지 못했다.
너무 아파. 누가 좀 도와줘. 잔뜩 움츠린 몸을 바르작거리며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숨이 막힌다. 춥다. 무섭다. 살고 싶어. 이런 끝은 싫어. 길지도 않던 삶이었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말하던 주마등은 보이지도 않았다. 무서울 기세로 졸음이 몰려왔다.
미오리네는 생각했다.
누구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
머나먼 꿈속에서 움켜진 것은 엄마의 손이었다. 남들과는 다르게 흙투성이였지만 햇빛을 머금은 것같이 따스한 손길이었다. 그 손에 이끌려 붉은 과실이 가득한 숲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결실이라며 잘 익은 토마토를 입에 들려주었다. 노란 과즙이 톡톡 튀며 혀를 아리게 만들었다. 이런 맛이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릴 즈음 불 꺼진 병원의 복도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귓가에 울림이 들려왔다.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살아있어. 숨을 쉬고 가끔 중얼대기도 해. 내보내도록 해. 에리크트, 그러기엔 너무 변이되었어. 밖으로 돌려보내면 금세 죽을 거야. 그게 네 일이야, -슬레타.
변이되었다는 게 무슨 이야기일까. 몸을 비틀어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하자, 두 비슷한 목소리는 끊어버린 전화처럼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내가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나. 잠결에 잠꼬대를 하듯 몸에 힘을 빼고 숨을 일정하게 내뱉었다.
“…일어났나봐.”
“나 먼저 돌아갈게. 다음 계절까진 해결해둬. 안 그러면 네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바닥을 끄는 소리가 몇 번 들린 후, 목소리는 사라졌다.
대화로 봐선 내가 이곳에 있는 게 불쾌한 모양이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저 끌려왔을 뿐인데…. 긴장감에 주먹을 쥐자, 다른 목소리가 다가와 얼굴을 살짝 움켜쥐었다. 우악스럽게 크고 단단한 손바닥이었는데 군데군데 빳빳한 털이 느껴졌다. 서투른 손길이지만 악의가 있어보이진 않았다.
“이정도 크기면 얼마나 자란 거지? 봤던 것 중 가장 작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걸까?”
서투른 손길은 얼굴에서 끝나지 않고 등을 지나 배, 엉덩이, 다리까지 이어졌다.
“눈이 완전히 망가졌네. 고칠 수 있을까? 그나저나 온몸에 이 상처는….”
상처투성이인지라 만지기만 해도 따끔거려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픔에 흐느끼자, 그 사람은 당황한 듯 미안하다며 몸을 내려놓았다.
“누, 구야….”
푸석한 목소리로 불러보았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천이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 불안해져 인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손에 잡힌 것은 두툼한 털이었다.
놓치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품에 가득 털을 껴안았다. 겉은 빳빳한데 속의 털은 부들거렸다. 덜덜 떨리는 작은 손으로 털을 파헤치곤 온기가 남아있는 속털에 얼굴을 부벼댔다.
“으음, 역시 --이랑은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어렵네.”
분명히 듣고 있는데 무슨 소릴하는 걸까? 내 말이 들리지 않냐며 물었지만 자꾸만 대화의 핀트가 엇나갔다. 털을 꽉 붙들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가 저를 들어 올리곤 품에 안았다.
“자꾸만 칭얼대는 게 참 어리광쟁이네. 자, 힘을 좀 풀자. 그렇게 꽉 쥐면 상처가 덧나.”
상처가 없는 부분을 토닥이다 쓸어내리곤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래된 집일까 생각하고 있으니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내가 일이 있거든. 그러니 계속 붙어있을 수 없어. 그렇지만 이대로 바깥으로 내보내면 죽을지도 몰라.”
“……!”
죽는다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죽음은 싫었다. 죽음은 차갑고 쓸쓸하고 지독한 냄새가 난다. 그런 몸이 되긴 싫었다. 끊임없이 살고자 했는데 이렇게 죽어버린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너무나도 억울했다. 천으로 가려진 눈꺼풀 아래로 자꾸만 눈물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참아야했다. 렘블랑의 이름은 약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미오리네는 버석거리는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오리네가 그러거나 말거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걸까? 생각하던 찰나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따스한 햇살이 몸에 닿았다. 감은 눈으로도 느껴지는 빛은 밝은 주홍을 머금었다.
화약 냄새도 피 냄새도 소독약 냄새도 나지 않는다. 오히려 푸릇한 풀내음이 가득했다. 멍하게 있으니 그가 축축해진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렇게 울면 눈가가 짓무르는데말야. 아가야, 난 널 버리지 않아. 이곳이 너를 받아들인 이상 돌려보낼 이유는 없거든.”
미오리네는 그 무엇도 알진 못하지만 그가 저를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이라면 내리지 않을 판단이었다. 처음 만난 수상한 사람을 이리 쉽게 믿어버리다니. 하지만 미오리네는 그를 믿기로 했다.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도피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간신히 얻은 따스함을 뺏기기 싫었던 어린아이의 발버둥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
저를 구해준 그는 어딘가 어설픈 사람이었다. 처음 믿음직스럽다 생각했던 부분도 어떨 때는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이 굴었다. 상식과는 동떨어졌다 해야 할까. 그런 문제들이 자꾸만 튀어 올라 미오리네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중략)
아이가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린아이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이와 떨어져 있든지, 잃은 것인지 둘 중 하나였다. 미오리네는 문득 그가 저에게 이런 애정을 보이는 것이 이해됐다. 나를 제 아이로 투영하는 것이다.
…분명 저를 버리지 않는다 했다. 렘블랑이라는 이름을 숨긴다면 계속 여기서 지낼 수 있을까? 망할 아버지의 눈에 들지 않고, 납치범의 눈에 닿지 않는 평범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붕대 아래 상처입어 보이지 않는 제 두 눈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눈은 예부터 사람의 첫인상을 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라 했지.’
그가 날 비쳐보는 만큼, 나도 그를 이용해본다면 어떨까. …말이 통하지 않는 걸 보면 외국인이겠지? 어째서 이쪽만 알아듣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는 잡으라고 있는 것. 미오리네는 그 기회는 놓칠 리 없었다.
#2.
슬레타는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아이는 너무나도 작고 여렸다. 어떻게 키운 것인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사고라니. 온몸에 가득한 상처들,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살아있다. 그런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낸다니 죽으라고 내던지는 거나 다름없다. 이미 이곳의 영향을 크게 받은 탓에 몸의 변이가 시작됐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을 배척하기 마련이다. 어차피 죽을 아이, 내가 가지면 어떠한가. 아무도 이해 못해. 에리크트도 동족들도.
“너 어쩌려고 그래. 인간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에리크트, 아직 어린 개체야. 충분히 보살핀다면 동족으로 자랄 수 있어.”
“…인간은 인간일 뿐이야.”
“잘 봐봐! 이정도로 동화가 잘 된 인간은 본 적 없어. …어쩌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혹시 동족들 때문이야? 그런 녀석들 신경 쓰지 말라했잖아!”
에리크트가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그의 얼굴은 슬픔과 분노가 섞여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신경을 어떻게 안 쓸 수가 있어. 그들이 너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을. 어중간한 반푼이로 태어난 탓에 운명조차 갖지 못한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에리크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번만큼은 질 수 없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알잖아, 파수꾼인 거 스스로 원한 게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한 번만 넘어가줘.”
“슬레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쌍둥이 언니를 바라봤다. 난 언니가 부러웠다. 어중간한 나와는 달리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니까. 운명을 가지면 그와 연결된 파트너를 만난다. 동족들 중 유일하게 짝이 없는 건 나뿐이었다. 그렇기에 파수꾼이 되었다. 평생을 파트너 없이 지내는 파수꾼. 그들은 어중간한 나를 이용해 집단을 유지했다.
세계의 틈엔 주기적으로 이물질이 떨어지고, 파수꾼인 나는 그것들을 밖으로 밀어낸다. 그 하나만 유지한다면 공동체에 끼어 지낼 수 있다. 강압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해서 상냥한 것도 아닌, 그저 ‘네 길은 하나뿐이야’ 제시할 뿐. 그렇게 시작된 생활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에리크트를 제외한 다른 동족들은 찾아오지 않는 이곳에서 오직 임무만을 위해 살아가야 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그 어린아이를 주워온 게?’
인간이 만든 물건이 대다수지만 가끔씩 인간 그자체가 떨어지기도 했다. 아이와 만난 날도 여느 때와 같았다. 인간이 만든 물건이 떨어지고, 그다음은 인간. 죽은 인간이면 밖으로 내보낸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멀쩡하게 형태를 유지한다면 내보낸다. 이미 세계의 영향을 받아 형태가 무너졌다면 죽이고 불태워버린다. 아이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세계의 영향을 받았지만 형체를 유지했다. 보통은 곤죽이 되어 주변을 오염시키는데 말이다.
벌어진 철덩이의 입에 반쯤 걸쳐져 있는 아이는 몸에 기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주홍빛을 띤 갈라진 문양. 몸 곳곳 길게 그려진 문양은 언뜻 보면 연결된 그림처럼 보였다. 처음 보는 현상에 이끌려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순식간에 문양은 빛을 잃었다. 이런 일은 문헌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이것도 변이의 일종일까? 그렇다는 건 밖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변이의 폭주로 죽을 테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입이 쩌억 하고 벌어지는 걸 손으로 막았다. 임무 중 감정을 드러내는 건 파수꾼답지 못했다. 주변에 남아있는 것이 또 없는지 확인하곤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상처 가득한 몸을 닦아내고 치료했다. 아깝게도 눈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어 보였다. 긴 천으로 덧나지 않도록 가렸다. 이렇게 어린 인간이라니, 막 태어난 동족보다도 작고 가벼웠다. 평소처럼 힘을 주면 겨우 얻은 아이를 제 손으로 망가뜨릴지도 모른다. 집안에 돌아다니던 <인간의 생태> 책을 꺼냈다. 파수꾼에게 필요하다며 에리크트가 구해다 준 서적이었다.
“아이 파트… 아이가 있는 부분이.”
(중략)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미오리네는 경악했다. 무엇이 그런가 하면 슬레타와의 생활이 모조리 그랬다. 몇 번을 말해도 알아듣기는커녕 헤실거리기만 했다.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헤실거리는지 아냐고? 그야 목소리가 바보 같았으니까!
슬레타가 인간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인간과는 달리 얼굴은 온통 털북숭이였으며 팔은 저보다 많을 때도 있었고 같을 때도 있었다. 혀는 저를 두 번 감고도 남을 정도로 길어 처음에는 놀랄 정도. 제 짧은 식견으론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유추하기 어려웠다. 몸이 다르니 상식도 다르기 마련. 슬레타의 방식이 싫다면 제 스스로 행동해야했다.
보이지 않고 대화도 통하지 않으니 말의 높낮이와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요청했다. 손재간으로 어찌저찌 원하는 것을 보여주자, 슬레타는 벌써 이런 것도 할 줄 아냐며 천재 아기라 칭했다. 도대체 얼마나 어리게 보는 걸까 기가 찼다.
오늘도 슬레타에게 안겨 현관 밖으로 나섰다. 따뜻한 온기와 여전히 짙푸른 풀내음이 이곳이 도심에서 떨어진 곳이란 걸 알려주었다. 하긴 슬레타처럼 특이한 사람(일단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이 도시에서 살았다간 난리가 났겠지. 적어도 평범한 생활은 무리야. …그나저나 여긴 도대체 어딘 걸까. 날 납치한 녀석들은? 슬레타가 다 무찔러준 걸까?
나오지 않을 답을 고민하던 미오리네는 제 손보다 몇 배나 큰 슬레타의 손가락을 꽉 붙잡았다. 인상을 팍 쓰고 있으려니 슬레타가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웃었다.
“인상 쓰면 못 써. 자자, 기분 풀자. 혼자서는 심심하지? 바빠서 미안해. 내일은 내가 친구가 될 이웃들을 만나게 해줄게. 동족은 아니지만 다들 유들하고 작아서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그게 뭐야, 만지면 좋아할 이웃이라니. 입을 삐쭉 내밀고 말했지만 여전히 슬레타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 슬레타에게 약간, 아주 약간 짜증이 났다. 다음날 슬레타가 데려온 그 말랑말랑하고 납작한 것을 받기 전까지 말이다.
납작하고 털이 고른 작은 생물은 찍찍 소리를 내며 주변에 머물렀다. 슬레타 말로는 여러 마리가 모여서 사는 날다람쥐 같은 생물이라는데 오늘은 먹을 것을 여럿 주고 데려왔다나. 그들은 종종 내 곁에서 온기를 제공했다. 덕분에 외롭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우리의 관계를 토론할 때마다 쓸모 있는 정보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파수꾼의 새끼. 파수꾼이랑 비슷한 냄새가 나.”
“바보야! 파수꾼이 낳았잖아!”
“모습 전혀 다른데?”
“파수꾼, 원래도 여러 모습으로 바뀌잖아. 팔도 다리도 마음대로 늘릴 수 있고. 어쩌면 파수꾼이 어릴 땐 저런 모습일 수도 있어.”
“하아…?”
여러 모습으로 바뀐다니 무슨 뜻이지? 황당한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헉, 파수꾼이 잘 보살피랬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됐다고 했잖아. 성체인 우리가 돌봐야해.”
“우는 거야? 새끼! 새끼 아파?”
“아냐! 그 정도까지 어리지 않아! 안 아프다고!”
안간힘으로 아프지 않다는 걸 어필했지만 온몸에 넓적한 솜털들이 다닥다닥 붙는 건 막지 못했다. 넓적한 털들에 파묻힌 꼴이란. 나가지 못하고 버둥대고 있으니 일을 끝내고 돌아온 슬레타에게 구출되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슬레타가 묻자.
“파수꾼, 우리 제대로 새끼 돌봤어. 우는 것도 달랬다고.”
“…울었어?”
큰 손가락이 안대 위를 천천히 만지다 둥글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물이 난 흔적은 없다. 애초에 울지 않았으니까.
“갑자기 크게 울었다고.”
“파수꾼 냄새가 옅어져서 그랬을까? 보통 부모랑 떨어지면 낯을 가리잖아. 파수꾼 새끼도 어리니까 그럴지도 몰라.”
“배가 고픈 걸 수도.”
“파수꾼은 평소에 뭘 먹여? 우리는 난황을 먹는데. 파수꾼 새끼는 난황을 제대로 못 먹더라고.”
그들이 준 손만 한 크기의 동그란 무언가는 떫은맛에 뭉그러지는 감촉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한입만 먹고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중략)
집으로 곧장 돌아온 슬레타는 제 안에 품은 미오리네를 천천히 꺼내 올렸다. 아까와는 다르게 작은 몸 곳곳 주홍빛 문양들이 옅게 빛을 내고 있었다.
“처음보다 더 빛을 내고 있어. 건강에 문제되는 건 아니겠지? 아냐, 그랬으면 처음 올 때 그렇게 됐었어야지.”
걱정스런 눈으로 아이의 문양을 훑었다. 반푼이로 태어난 나처럼 이질적인 몸을 가진 아이. 더 이상 동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이대로 더 바뀌어서 나와 함께 영원히….
“그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야지.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도록 내가 잘 보살펴줄 테니까.”
슬레타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가족이 된다는 뜻. 없는 운명이라면 스스로 만들어 나눠주고 싶었다.
“미오.”
인간세계에선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모르겠지만, 슬레타는 아이에게 ‘미오’라는 이름을 얹어주었다. 큰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 봤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작은 소동물이 우는 것처럼 귀여운 단어.
“네 이름은 이제 미오야. 미오.”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오’라고 단조롭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그 말에 아이는 고개를 위로 살짝 들어올리나 싶더니 ‘미오’라는 단어를 따라했다.
“응, 미오. 미오!”
“미오리네.”
“…으응?”
“미오리네.”
미오리네, 좋은 울림. 아이의 입에서 나온 똑바른 단어. 슬레타가 놀라 멍하니 있자, 아이는 ‘미오리네’라는 말을 반복하며 가슴의 털을 쥐어뜯었다. 혹시 ‘미오’만으론 부족했던 걸까?
“미, 미오리네?!”
“-----!!”
“…미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분명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제대로 된 언어로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곧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역설적이게도 오래 산 쪽은 이쪽인데 아이는 제 말을 알아듣고, 저는 오히려 알아듣지 못했다. 어째서 미오리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걸까. 그 알 수 없는 문양 때문일까. 고민을 해봐도 선례가 없었다. 그렇다면 제가 더 노력할 뿐이다.
***
“그러니까, 이게 산책이고, 이게 밥…. 그리고 이게….”
퍽, 미오리네의 작은 주먹이 슬레타의 몸에 꽂혔다. 아무래도 이게 아니었나보다. 미오리네와 소통하기 위해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몸으로 말하는 법을 익혔다.
처음은 간단한 단어 정도였는데, 최근에는 긴 문장까지 터득했다. 점점 원하는 것을 알게 된다. 슬레타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그리고 그건 미오리네도 마찬가지였다.
슬레타와 함께하는 지금이 겪었던 삶보다 훨씬 애정이 깊었다. 감시하는 사람도 아부하는 사람도 없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이유 없는 사랑만이 존재했다.
“슬레타는 내 엄마가 되고 싶은 거야?”
알아듣지도 못하는 슬레타 앞에서 일부러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는다. 상관없어. 애초에 답을 들으려 했던 것도 아니니까. 미오리네는 대수롭지 않듯 입꼬리를 올리곤 얼버무렸다.
잠이 오지 않았다. 역시 아까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슬레타에게 무얼 바라는 걸까? 나에게는 이미 돌아가신 엄마가 있었다. 엄마의 자리는 만석이나 다름없는 거다. 그럼에도 자꾸 술렁거린다. 슬레타가 내 가족이 되어줬음 좋겠어. 그렇지만 엄마의 자리까지 주고 싶진 않아. 미오리네에게 엄마는 노틀렛 렘블랑 하나였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슬레타의 침대로 다가갔다. 빗질을 해 부드러워진 털이 손가에 느껴졌다. 그대로 몸을 던져 안겼다. 엄마와는 다른 몸. 그렇지만 엄마처럼 따뜻하고 안심되는 몸. 미오리네는 오랜만에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워졌다.
#3.
계절은 여전히 가을. 내가 이곳에 온 지도 꽤 지나 키가 네 뼘만큼 커졌지만 계절은 고작 하나가 지나갔다. 아무래도 이곳의 계절은 년 단위로 지나가는 모양이다.
여름동안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했다. 슬레타가 말한 몸 전체에 퍼진 문양. 이것에 집중하면 주변의 환경이 흐릿한 형태로나마 머릿속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자주 부딪히고 넘어졌지만 지금에 와선 도움 없이도 집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슬레타는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지만 언제까지고 의존할 순 없는 노릇이다.
“좋아, 여기는 됐고.”
마른 땅에 물을 주곤 자란 작물을 바라보았다. 가끔씩 인간세계에서 떨어진 씨앗으로 키운 밭이다. 젖 이외에 먹을 수 있는 게 없던 미오리네에게 굴러온 호재. 토마토를 비롯해 호박, 감자 등의 여러 채소를 키울 수 있었다. 햇빛과 물. 그리고 이상한 난황덩어리만으로 살아가는 슬레타들은 모르겠지만 인간은 주기적으로 고기나 채소, 과일을 먹어야했다.
“여전히 성장이 빠르네. 슬레타가 말한 대로 이 이상한 힘과 연결돼 있는 걸까?”
미오리네의 곁에 있으면 식물의 성장속도가 눈에 띌 정도로 빨라진다. 때문에 지금 시기에 열매를 맺지 않는 작물들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중략)
한동안은 무척 바쁘게 흘러갔다. 겨울을 대비해 집의 단열을 신경 쓰고, 에리크트에게서 보급품을 채워 넣고 수확한 야채들을 말려 보관해 놨다.
짧은 며칠 사이에 이곳의 온도는 빠르게 떨어졌다. 털뭉치 이웃들도 모두 동면에 들고 슬레타 역시 겨울털을 불리곤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한낮에 혼자 나와 말라버린 세상을 걸어 다녔다. 바닥에는 부서진 낙엽들이 잔뜩이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퍼석퍼석 소리가 났다. 내가 가진 힘으로도 겨울은 소용이 없는지 푸른 싹 하나 피워내지 못했다.
“…자고 있어.”
자다가 깨기를 반복하는 슬레타를 꼬옥 껴안았다. 인간의 시간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이곳의 겨울. 애초에 인간들이 전쟁을 하기에 이렇게 된 거다. 이래서 인간은 꺼려진다. 아버지는 물론 제 곁에 있던 자들 대부분 원하는 것이 있으면 폭력을 사용했으니까. 그들과 동족이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다.
제 스스로를 만져봤다. 이젠 제법 티가 나는 귀와 꼬리. 사라지지 않는다던 주홍빛 문양. 어린아이가 아닌 성장한 몸.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멀리 왔지만 그렇다 해서 완전히 인간이 아닌 건 아니다. 변했다면 이미 동면에 들어갔겠지. 이럴 거면 빨리 변했으면. 에리크트의 말대로 시간 날 때마다 서로 붙어있는데 어째서 아직도 인걸까.
“하아….”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민하다 보니 식사를 거른 것도 잊고 있었다.
(중략)
뭐가 그리 성급한지 말이 빨라졌다.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기 전에 입을 막았다.
“아냐 됐어. 신경 쓰지 마. 괜한 말 했어. 난 슬레타랑 함께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니까.”
“미오리네, 난 언제나 진심이야. 잘못된 게 있으면 고칠게.”
알고 있어. 슬레타가 진심인걸. 인간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는 내가 나빠.
“따뜻하게 해 줘. 추워.”
부드러운 가슴털에 안긴 그날, 첫눈이 내렸다. 잠시나마 깼던 슬레타도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았다. 싸늘한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온 세상이 희게 변했을 때 다시금 혼자임을 느꼈다.
***
“스물넷, 스물다섯… 후우, 감자만 스물다섯 포대인가?”
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내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몸이 변한 뒤로 이런 포대 같은 것을 쉽게 옮기게 되었다.
겨울이 온 지도 486일. 인간의 날짜로 따지면 1년 하고도 4개월. 긴 겨울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얼은 물은 보급품으로 온 발열석으로 녹여 사용하고 창문은 환기용 하나 빼고는 전부 막아 단열에 신경을 썼다.
추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열의 공급이 최우선. 집안의 활동범위를 줄였기에 요즘은 슬레타가 자고 있는 아랫방에서 함께 잤다. 발열석으로 모퉁이를 두르고 있기에 이곳은 다른 곳보다 따뜻했다.
“위쪽은 문제없었고 오늘은 오른쪽을 가봐야겠네.”
슬레타가 하던 파수꾼 일을 이제는 제가 하고 있다. 가끔씩 인간세계에서 물자가 떨어지는 일이 있기에 그걸 주으러 다녔다. 슬레타는 조난당한 산 것들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다행히도 지금까지 본 적은 없었다.
나가기 전, 두꺼운 옷을 걸치고 모자를 썼다. 길어진 귀와 꼬리가 접히는 건 어쩔 수 없다. 지난번엔 그대로 나갔다가 귀가 얼어 한동안 고생했다.
“그럼 잘 다녀올게, 슬레타.”
“…….”
돌아오지 않을 말을 기다리다 이내 길을 나선다. 시력이 없어도 문제없다. 오히려 이런 환경에서는 시력보다는 다른 힘에 의존하는 게 나았다. 청력이나 후각. 그리고 이능. 뽀득거리는 눈밭을 헤치며 나아간다.
날카로운 바람을 타고 낯선 냄새가 들어왔다. 이 냄새는 인간일 적 맡아본 적 있는 냄새. …인간이다. 그것도 화약냄새에 찌든 인간 남자. 눈 쌓인 언덕에 홀로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 같이 떨어져 있는 물건들을 수습했다. 킁킁, 코를 대보니 마른 식량이다. 오랜만에 다른 식량이라니 기뻤다. 그대로 짐을 들고 가려던 그때.
“으으….”
뒤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살아있는 건가? 바람소리를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몸을 숙이곤 땅에 귀를 기울였다. 작지만 심음이 들린다. 아직 살아있다. 어쩌지?
미오리네는 인간을 밖으로 내보내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죽는 걸 방치하기엔 양심이 찔렸다. 이곳에 두면 분명 동사하겠지.
“하아, 내 앞에서 누가 죽는 건 싫은데….”
고민 끝에 결국 그를 데려가기로 했다. 마침 예비용으로 만든 창고가 있으니 그곳에 욱여넣기로 했다. 기력이 있다면 살 것이고 아니면 죽을 것이다. 최선을 다한 일에 후회는 없다.
발열석을 두고 그를 눕혔다. 가진 짐을 뒤져보니 총과 알 수 없는 기기들이 나왔다. 이런 세세한 물건은 잘 보이지 않아 사용할 수 없고. 총은… 이곳엔 필요 없는 물건이니 적당한 곳에 묻어뒀다.
“…민폐거든, 당신.”
운이 좋으면 살겠지 생각하며 방치한 남자는 온도만 맞춰주니 식물처럼 되살아났다. 가뜩이나 식량도 부족한데 입만 늘어서는 쓸데없는 말까지 나불거린다.
이곳은 어디냐느니, 조용한 곳이 좋다느니, 언재까지 눈이 내리냐느니, 집안에서도 싸매고 있냐느니 등등 말이다. 단점투성이지만 장점도 있었다. 인간세계의 현 동향 말이다.
전쟁이 벌어진 지는 5년째. 대강국에서 시작된 전쟁은 연합이 되어 세계로 번진 모양이었다. 주축국에는 미오리네의 나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면 제 아버지의 짓일지 모른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딸인 내가 납치를 당해 실종됐으니 그걸 빌미 삼아 전쟁을 만들었겠지. 전쟁은 무기를 파는 사람에게 돈을 가져다주고 권력을 쥐어준다.
“윽….”
기분이 나빠졌다. 대충 얼버무리고 적당히 답해주었다. 남자는 살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고마워했다.
“이 창고 반경으로 나가지 마.”
오랜만에 생긴 대화상대지만 남자를 가까이 두긴 껄끄러웠다. 내게는 슬레타가 있다. 슬레타와 나와의 공간까지 내줄 생각은 없다.
겨울에 돌아다니면 곰에게 뜯어 먹힌다느니 대충 겁을 줬다. 하지만 그가 있는 시간이 2주가 넘어가면서 거짓으로 붙들어둘 수 없게 되었다. 활동반경이 넓어졌고 이윽고 집까지 발견하게 되었다.
“좋은 집에 사시면서 왜 저는 그 좁은 창고에 두고 가셨을까.”
“…신혼집에 외간남자를 들이는 법은 없으니까.”
빈정거리는 말에 똑같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답했다.
“결혼하셨어요?”
“그래, 그이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싫어하니 집 근처로 올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아. 만난다면 그대로 벗겨서 내동댕이칠 거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슬레타가 내동댕이치기 전, 내가 먼저 내동댕이치겠지.
“그나저나 요즘 몸이 간지럽더라고요. 동상이라 그런가?”
그를 흘긋 보았다. 흐릿한 팔다리에 검은 무언가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건 본 적 없다. 불길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거 언제부터 그랬어.”
팔을 가리키자 그는 몇 번 몸을 긁적이더니 멋쩍게 웃었다.
“오늘 아침부터요. 가렵기는 한데 아프지는 않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제대로 덮고 자. 괜히 신경 쓰이니까.”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신경 쓰일 짓을 한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루가 가면 갈수록 내부의 검은 것들이 요동을 쳤다. 처음에는 코피, 그다음에는 발작, 그 다음에는 피가 섞인 구토. 바닥이 토혈로 물들고 남자의 형태가 무너진다. 몸속의 검정이 몸을 뚫고 나온다. 무섭다.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된 거지?
“크억…! 왜…!!”
미오리네의 문양이 빛을 냈다. 불길하게 빛나는 어두운 푸른빛이다. 쾅-! 소리와 함께 작게 지어둔 창고가 날아갔다. 통나무가 이리저리 휘날려 주변의 것들을 찢어 갈겼다.
도망가야 해. 머릿속엔 온통 슬레타 뿐이었다.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슬레타가 슬퍼할 거야. 죽으면 슬레타가 혼자 남아!!
옷 밖으로 꼬리를 꺼내 날아오는 부산물들을 쳐냈다. 무늬 있는 두 개의 흰 꼬리가 불안한 듯 양옆으로 흔들린다.
“큿…!”
내 힘으로 저걸 무찌를 수 있을까? 아니, 무리다. 보기만 해도 느낄 수 있다. 저것에 가까이 가면 죽을 수 있다는 걸. 무슨 수를 쓰든 저걸 내보내던가 슬레타를 잠에서 깨워야 했다.
“헉, 헉… 총! 녀석이 가져온 총이라면…!”
숨겨뒀던 총이라면 저것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미오리네는 눈 속을 파헤쳐 숨겨둔 긴 나무상자를 꺼냈다. 꽁꽁 언 총엔 다행히도 총알이 여덟 발 있었다.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장전을 했다. 눈 속에 오래 있던 터라 제대로 격발 할진 미지수지만 시도는 해봐야 한다. 어렸을 적 제 아버지에게서 배웠던 기억을 되살렸다. 그때는 정말 하기 싫었는데 지금에서야 도움이 되다니 웃기지도 않을 일이다.
타탕-!
큰 탄음소리, 곧이어 괴이의 비명이 들린다. 흐릿한 연기에 구멍이 난다. 빠르게 연이어 총을 쐈다. 이번에야말로 해치우길 바랐지만 그 바람은 철걱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걸렸어!”
탄피가 걸린 총은 둔기나 마찬가지. 급하게 탄피를 빼내려고 했지만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손아귀에 꽉 쥐고 둔기로라도 쓰자. 생각한 그때, 큰 충격이 미오리네를 덮쳤다.
무엇이 공격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땅에 몇 번이고 처박혔다.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고 코에서는 피냄새가 난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처럼 온몸이 아팠다. 차가운 바람이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왼쪽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몸이 식어간다.
“슬레타아….”
짝의 이름을 겨우 불렀다.
그날처럼 나를 구해줘, 슬레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