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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미오 <기억에게 여의를>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거세게 쏟아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사방의 진탕이 폭포와 강을 따라 쏟아져 주변은 순식간에 진흙빛으로 물든다.

그 말인즉, 폭포 뒤편에 마련한 내 보금자리, 이 동굴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소리. 벌써 입구 쪽은 진탕물이 스며들어 어두운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치운다 한들 강이 다시 범람하면 또다시 더러워질 게 뻔했다. 기껏 깨끗하게 치웠는데…. 둥그런 눈썹이 한껏 내려갔지만, 자연재해란 한낱 미물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진탕이 닿지 않는 동굴 깊숙한 곳으로 길게 뻗은 몸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더 이상 폭포 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숙한 안쪽에는, 제법 넓은 공동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곳에 살던 주인을 쫓아내고 차지한 이 보금자리는 지하수가 솟아나는 작은 지하 호수와 틈마다 은은한 빛을 내는 이끼들이 어우러져 조용하고도 아늑했다.

“여기까지 흙탕물이 넘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긴 꼬리를 적당히 말아 몸을 축 늘어뜨렸다. 습도가 높은 날엔 이렇게 늘어져 있는 게 차라리 편했다.

쾅-!

공동 전체가 울릴 만큼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렇게 큰 소리는 살아오면서 처음이다. 폭포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걸까? 아니면 거대한 나무가 쓰러진 걸까? 두 갈래로 갈라진 긴 혀를 날름이며 붉은 비늘을 바싹 세웠다. 이 정도의 굉음이라면 분명 이 근처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리였다.

“…이건 피 냄새?”

눅눅한 공기 사이로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털짐승이라기엔 특유의 털내음이 없었고, 날짐승이라기엔 기름기 어린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맑고 시원한, 청량감마저 감도는 낯선 향이 흘러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본능을 자극하는 그 향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이번에야말로 자신과 같은 동족일지도 모른다. 알에서 깨어나 성체가 된 이후로 수많은 계절과 풍경이 지나갔지만, 자신과 닮은 존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쏴아아, 계속된 비 탓에 폭포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깎여진 절벽에는 긴 상흔이 그어져 있었고, 맑았던 강물은 붉은 기가 섞인 짙은 흙탕물로 변했다. 누가 봐도 싸움의 흔적이었다. 잔뜩 휘갈겨진 흔적들 속에서 피 냄새의 주인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흘러나온 핏자국과 곳곳에 떨어진 비늘만 따라가면 됐으니까.

그렇게 부러진 숲을 헤치며 나아간 곳에는 피를 흘리며 숨을 간신히 내쉬는 네발짐승이 쓰러져 있었다. 

“처음 보는 짐승….”

얇고 긴 뱀과 같은 몸에 네발짐승처럼 네 발을 지닌 요상한 짐승이었다. 머리에는 사슴처럼 길게 뻗은 뿔이 나 있었고, 머리에서 꼬리까지 흐르듯 이어진 은빛 갈기는 바람에 흩날리며 말의 갈기를 연상케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존재는 내가 좇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닮은 부분이라곤 길쭉한 몸뿐. 몸을 뒤덮은 비늘의 형태도, 달린 발의 개수도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애초에 자신은 뱀이지, 이런 독특한 짐승은 아니었다.

“이대로 둔다면 죽을 텐데….”

이미 피를 한참이나 흘렸다. 날씨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이대로 이곳에 두면 죽을 게 뻔했고, 시체 냄새를 맡고 다른 놈들이 몰려들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차라리 먹어 치워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 정도 크기라면 우기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될 터였다.

짐승의 아래로 파고들어 등을 타고 그대로 그 몸을 걸쳐 올렸다. 이만한 크기의 먹잇감을 먹으려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노출된 장소보다는, 차라리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천천히 먹는 편이 나았기에. 평소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폭포의 뒤편, 보금자리로 몸을 옮겼다.

“그르릉….”

죽은 줄로만 알았던 짐승이 눈을 뜬 건, 보금자리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 정도 상처를 입고도 살아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다.

“여기는… 어디고, 넌… 뭐야. 날 어떻게, 후욱… 할 생각이지? …날 공격한 게 너야?”

“아, 아니요. 그건… 제가 아니고요.”

“날… 삼키려고, 했어….”

“그게… 그러니까.”

먹으려던 건 사실이라, 변명할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필 입을 벌린 그 순간 정신이 돌아온 게 화근이었다.

“그, 그쪽이 죽은 줄 알았단 말이에요.”

“…내가?”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의 몸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흐르는 피와 벗겨진 비늘 틈으로 드러난 상처가 쓰라리지는 않은지, 몸을 더욱 안으로 웅크리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기억, 안 나. 뭐가 뭔지 모르, 겠어.”

“그, 그러면 이렇게 해요! 도와줄게요! 원래는 죽은 줄 알고 먹으려고 했는데 살아 있으니까요!”

“후욱… 못 믿겠는데…. 방심시켜서, 죽일 수도 있잖아.”

“죽을 때까지 안 먹을게요! 공격도 안 할 테니까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이렇게 심하게 다쳤으니 네발짐승의 행동도 이해가 갔다. 자신 역시 어릴 적엔 수많은 포식자를 피해 도망치거나 숨죽인 채 몸을 숨겨야 했으니까. 어려울 것도 크게 없다. 산다면 좋은 거고, 죽으면 먹으면 그만인 일이니까.

동족은 아니지만, 이 특이한 네발짐승을 곁에 두고 싶었다. 청량하게 스치는 체향도, 자신처럼 유연하게 뻗은 긴 체형도, 물에 비친 반짝이는 은색의 비늘도, 부드럽게 흩어진 털가죽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죽기엔 너무 아까운 짐승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 안 나요?”

본능적인 것들을 제외하면, 네발짐승이 알고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어째서 이곳에 상처를 입은 채 떨어졌는지도, 원래 어디에 살았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절벽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상흔을 보면 결코 어설픈 다툼 따위는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읏, 아프다, 니까….”

“아! 얘는 먹으면 안 돼요. 잘 키워서 오래오래 써야 해요.”

보금자리 한구석, 이끼 위에 놓여 있던 통통한 회복벌레를 물어와 상처 위에 살포시 얹었다. 이렇게 올려두기만 해도 대부분의 상처가 회복되기에 여러 마리를 잡아 이곳에서 기르며 아껴 쓰고 있었다.

“이런 조그마한 녀석들이, 뭐라고. …상처가 낫겠어?”

“걱정하지 마세요. 나을 거예요.”

“…읏! 됐어, 빨리 저리 가버려!”

네발짐승은 뭐가 그리 싫은지 그르릉 거리며 눈을 세모나게 떴다. 원래도 이렇게 경계심이 많았던 걸까? 이런 상태라면 며칠이 지나도 그리 친해지지 못할 거 같았다.

“기다릴게요!”

다행히 지혈은 된 듯 더 이상의 피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치만 저렇게 몸을 함부로 움직인다면, 아무리 상처를 회복시켜도 다시 벌어질 게 뻔했다. 최소한 벌레들만큼은 얌전히 다뤄줬으면 좋겠는데….

“…아, 미안해. 얘들아.”

삐익, 삐익- 불만을 토로하듯 울어대는 회복벌레들을 조심스레 달래며, 갑작스레 나타난 네발짐승의 경계가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길 바랐다.

다음 날이 되어도, 또 그다음 날이 되어도 비는 쉴 새 없이 퍼부었다. 평소보다 거세진 바람, 살을 에는 듯이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 보금자리 앞의 강이 마침내 범람하기 시작했다. 진흙이 섞인 흙탕물이 둔턱 바로 밑까지 아슬아슬하게 차올랐다. 이대로라면, 겨우 마련한 보금자리가 더럽혀지고 말 테지.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해야 하나?

회복벌레들이야 비늘 틈 사이에 집어넣으면 그만이지만, 이 무지막지한 폭우 속에서 네발짐승을 데리고 멀리까지 갈 수 있을까?

“…갈 거야.”

“이런 몸으로요?”

“여기 잠긴다면서. …남에게 짐 되는 건 더더욱 질색이거든.”

“짐이 된다뇨…!”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뭐가 짐이 아니야, 정말…. 그러고 보니 너, 피신할 곳은 정해놨어?”

새로 몸을 뉘일 곳은 이곳보다 훨씬 높은 산 언덕에 자리한 바위 동굴이었다. 원래 이곳에 머물기 전, 후보지로 고민했던 곳이지만, 영역 안을 지나치는 짐승들이 많아 결국 포기했던 곳. 지금 같은 날씨엔 돌아다닐 녀석들도 드물고, 주변에 범람할 강도 없으니 지금은 임시 보금자리로 삼기에 괜찮았다.

“괜찮아요. 혹시 모르니 제가 먼저 가서 확인해볼게요.”

그렇게 기세 좋게 말은 해놨지만, 워낙 좋은 위치라면 벌써 누군가 먼저 둥지를 틀고 있으면 어쩌지… 그게 조금 걱정이었다. 나쁜 예감은 딱 들어맞는다고 하던가. 걱정한 대로 예비 보금자리는 이미 하늘을 나는 커다란 새 떼가 차지하고 있었다. 녀석들이 여럿 달라붙어 동굴 입구를 막고 있어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기….”

입을 떼자마자, 수많은 부리들이 딱딱거리며 불쾌한 위협음을 내기 시작했다.

“까악-! 까악-! 나가라! 나가라! 뱀! 잡아먹힌다! 우리 둥지에서 꺼져라!”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소음에, 이제는 배설물까지 마구 뿌려댔다. 이 정도 무리라면 힘을 써서 쫓아낼 수도 있겠지만, 싸움 끝에 엉망이 된 보금자리를 다시 고치는 데엔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게다가 이놈들은 지저분하게 사는 습성이 있어, 그런 수고는 더더욱 아깝게 느껴졌다.

불만스러움에 두터운 꼬리를 한 번 휘두르고는,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몸을 움직였다. 두 번째로 향한 곳은 거대한 나무의 옹이구멍. 어릴 적, 너무 깊이 빠졌던 일이 있어 그 뒤로는 찾지 않았던 곳이었다.

“분명 엄청나게 큰 구멍이었지…?”

수해(樹海)의 중심부에 선 그 거대한 나무 안에는 보통 여러 생물이 함께 살아간다. 옹이구멍은 그 나무 속으로 들어서는 출입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번에 찾은 곳은 전 주인이 죽은 뒤 뼈만 남겨진 버려진 보금자리였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몸집도 커졌으니 구멍에 빠져 길을 잃을 일도 없었다. 나무 안쪽에는 지난번 본 것 그대로 앙상한 뼈가 고요히 남아 있었다.

“전처럼 아무도 없어. 안쪽은 꽤 넓고, 우기 때라면 원래 보금자리보다도 좋을지도….”

상당히 위쪽에 자리 잡아 범람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뼈는 밖으로 치워버리면 되고, 벌레들이 먹을 이끼는 원래 보금자리에서 조금씩 뜯어오면 그만이었다.

“헉… 헉, 너무 멀어.”

“…그게 원래 생각했던 곳은 이미 주인이 있어서요.”

이제는 익숙해질 정도로 퍼붓는 비를 헤치고 새로운 지역으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원래 머물던 강가와는 달리 이곳엔 올려다봐야 할 만큼 거대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양한 식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탓에 구조가 무척 복잡해 보금자리에 닿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이렇게 거대한 나무들은 처음 봐.”

“기억을 잃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네발짐승 씨 말이에요.”

“아냐…, 그런 느낌은 아닌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네발짐승이 뭔가 거슬렸는지 짜증이 어린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너! 그 이상한 호칭은 뭐야?”

“호칭이요? 애초에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잖아요?!”

“하아? 네발짐승이 뭐냐고? 장난해? 너도 그러면 기어 다니는 짐승이야?”

“…네에?! 저, 저는 슬레타인데요!”

“나도 네발짐승이 아니라 미오리네인데!”

분명 저번에 물어봤을 때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으면서 지금에서야 떠올리다니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저번에는 모르겠다면서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기억나.”

시치미를 떼며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 미오리네 씨의 태도에, 괜스레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서였을까? 그 살랑거리던 꼬리를 덥석 물어버린 게.

“너! 나 안 먹는다면서!”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면서요. …저, 저도 생각이 바뀔 수 있는 거죠!”

미오리네 씨의 체구와 내 체구를 비교했을 때 절대적인 우위에 놓인 건 바로 나였다. 파르르 떨리는 꼬리를 천천히 입안으로 밀어 넣고 갈라진 혀로 살짝살짝 핥자, 미오리네 씨는 눈을 꼭 감은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나, 맛없으니까… 먹지 마….”

그 순간, 쿵-하고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처음 겪는 기이한 감각에 미오리네 씨를 급히 뱉어내고는, 놀란 채로 몸을 빙빙 꼬며 가슴 부위를 훑었다. 상처는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 장난이에요. 안, 할 테니까요…. 그, 그러니까 미오리네 씨도, 자꾸 그러지 마세요!”

“…알았으니까.”

몸을 추스른 뒤에도, 우리 사이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금만 닿았을 뿐인데도 맛있다고 느껴졌다. 상처 때문이었을까? 역시 그것밖에 없겠지?

“이번에 자리를 잡으면 제대로 된 걸 잡아 올게요.”

“…물고기 말고, 질렸으니까.”

“네!”

이곳엔 바위만큼 큰 새들과 거대한 짐승들이 여럿 살고 있어서, 미오리네 씨가 원하는 사냥감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특히 우기에는 이들이 몸을 피하려 특정 장소에 모이는 습성이 있어 더욱 그랬다.

“슬레타, 너 말이야. 왜 나를 데려올 생각을 한 거야?”

“가, 갑자기요?”

“아무 말 없이 계속 걷는 것도 좀 그래서. 분위기 전환도 할 겸.”

먹으려고 데려왔다고 하긴 좀 그렇지 않나? 아니, 그 얘긴 이미 한 번 했었는데. 어쩌지?
고심 끝에, 미오리네 씨가 기분 상하지 않을 말을 골라 조심스레 내뱉었다.

“처음에는 도, 동족인 줄 알아서요. 아니었지만요.”

“동족 말이야?”

“저는 미오리네 씨처럼 다리도 없고, 뿔도 없고, 이빨도 다르고….”

미오리네 씨는 내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슥 훑어보더니, 어딘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야, 너 이무기잖아. 완전 동족이 아니라고 하긴 어렵지.”

“…이무기요? 이무기가 뭐예요?”

“너 스스로도 잘 몰라?”

“이곳에 계속 혼자 있어서요…. 미오리네 씨 같은 짐승도 처음이에요.”

미오리네 씨는 무언가 떠올리려는 듯 머리를 싸매더니, 애매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무기는 용의 전 단계 중 하나로, 이무기가 어느 정도 이상의 기운을 머금고 여의주를 만들면 용이 된다고 했다. 일반적인 용은 용으로 태어나지만 가끔 아주 희귀한 확률로 뱀에서 이무기로, 이무기에서 용으로 변한다고 했다.

“나도 풍문으로만 들었던 이야기여서 잘은 모르겠지만, 너는 꽤 기운을 모았는데도 아직도 용으로 변하지 않았다니, 이상하네.”

“미오리네 씨도 여의주가 있어요?”

“…아니, 지금은 없어. …기억과 함께 여의주를, 잃어버렸거든.”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게 정말이었던 거예요?”

“그럼, 거짓말인 줄 알았어…?”

“너무 잘 알고 있길래, 거짓말인줄….”

여의주를 가진 이무기는 용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의주를 잃은 용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럼 미오리네 씨는, 그 여의주라는 걸 되찾아서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는 게 목표인가요?”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거든.”

“그게 무슨?”

미오리네 씨의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 한 발자국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덜덜 떠는 모습. 아직 미오리네 씨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미오리네 씨! 미오리네 씨!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추워…, 배고파.”

서둘러 미오리네 씨를 등에 태우고 새 보금자리로 빠르게 향했다. 미오리네 씨의 몸이 이렇게 빨리 식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처음부터 등에 태우고 갔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너무나도 안이했다.

“헉, 헉… 몸을 닦아내야 해.”

미오리네 씨의 몸을 데워야 하는데, 하필 마른 것 하나 없었다. 비가 온 지도 벌써 며칠째니 없는 게 당연했다. 급한 마음에 미오리네 씨를 칭칭 감아보았다. 뱀치고는 따뜻한 몸이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채 꼭 껴안고 있었다.

“숨 막혀…!”

“미, 미오리네 씨?! 정신이 드셨어요?”

“정신…? 여기는 어디?”

“이번에 새로 옮긴 보금자리예요. 오던 도중 미오리네 씨가 쓰러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이제부터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절대 밖에 나가시면 안 돼요!”

“그렇게까지 과보호할 필요는…. 뭐야, 네가 몸을 데워준 거야?”

“그야, 미오리네 씨. 몸이 얼음장 같았으니까요.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요….”

긴장이 풀려 몸이 추욱 늘어지자, 그 무게 때문인지 미오리네 씨의 하얀 몸이 내 붉은 몸 안에서 꿈틀거렸다. 네 개의 다리가 맞닿은 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오더니, 발톱으로 붉은 비늘을 벅벅 긁으며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슬레타, 무겁다니까. 나 아직 환자야.”

“조금만 더요. 회복벌레 얹어드릴게요….”

비늘 틈 사이로 회복벌레들이 포르르 날아 나와, 우리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포슬포슬한 포자털이 흩뿌려진다.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으니 따뜻하고 제법 가족처럼 느껴졌다.

***

벌써 한 달이 넘도록 비가 내리고 있다. 아무리 우기라지만, 이렇게 한 달 내내 비가 오는 건 드문 일이다. 이상하게도 이번 우기는 모두에게 유난히 지독하게 느껴졌다. 잦은 비에 강은 범람한 지 오래고,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환경에 많은 짐승들이 이 지역을 떠나고 있었다. 점차 사냥감들이 부족해지면 육식을 하는 짐승들도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 이상해요? 날씨요?”

“아무리 우기라고 해도 한 달이 넘게 비만 오는 일은 없잖아? 그치지도 않고 말이야. 이제 와서 떠오른 건데… 어쩌면 여의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여의주라면, 저번에 미오리네 씨가 잃어버렸다던 중요한 물건 말인가요?”

“맞아. 용의 여의주는 날씨를 조종한다고들 하지. 비를 내리게 하는 것도, 구름을 걷어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미오리네 씨가 기억과 함께 잃어버렸다고 했던 여의주. 잔뜩 구멍이 나 있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며칠이고 애써봤지만, 실마리는커녕 험악한 날씨에 결국 찾는 걸 포기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그게 여의주의 영향이었다니, 아무래도 여의주라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물건인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이 지역에서 내 여의주를 가지고 일부러 비를 내리게 한 누군가가 있다는 소리잖아.”

“미오리네 씨, 정말 머리가 좋으세요!”

“내가 몇 년을 살았는데, 이무기인 너보다는 똑똑해야지!”

“멋있어요! 굉장해요! …근데, 몇 살이신지는 기억나세요?”

“…….”

가끔 미오리네 씨는 할 말이 없으면 이렇게 입을 꾹 다물곤 한다. 이번에도 뭔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흥!” 하고는 나무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럴 땐 맛있는 걸 사냥해 오면 그나마 화가 좀 풀린다. 뭘 잡아야 할까 고민하던 순간, 문득 여의주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의주… 용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 못 만드는 걸까?” 

미오리네 씨는 분명 내게 동족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용이 될 만큼 기운도 충분히 채워져 있으니, 오히려 아직 변하지 않은 게 이상하다고도 했었다.

“만약 내가 여의주를 만들 수 있게 된다면… 미오리네 씨에게 주고 싶어.”

여의주를 잃어버린 용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지만, 미오리네 씨는 그런 건 묻지 말라며 슬며시 몸을 피하곤 했다. 소중한 걸 가지고 있다가 잃는 일이 얼마나 속상한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기에, 미오리네 씨가 그 일로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의주는 어떻게 만드는 걸까….”

답답했다. 정작 당사자인 자신이 여의주를 만드는 방법조차 모른다니.

“오늘은 좀 더 멀리까지 가볼 생각이에요. 이 근처엔 이제 사냥감들이 안 보여서요.”

“조심해. 요즘 번개가 자주 치더라.”

“나무에도 몇 번 떨어졌었죠? …어쩌면 우리도 보금자리를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 말에 미오리네 씨는 잠시 고민하더니, 무언가를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곳에서의 생활이 더 이상 쉽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겠지.

“이곳을 떠나면… 하아, 아니야. 떠나는 게 맞겠지. 더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미련을 두지 말자. 너도 그렇게 생각해.”

“여의주를 찾는 거 말이죠? …알았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오리네 씨의 여의주를 찾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기로 한 이상, 여의주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은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적어도 후회는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먼 곳까지 나아가, 날씨를 움직이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최근 구름의 모양은 마치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그 파도가 시작되는 곳으로 가면,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는 물론, 번개까지 점점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근처의 높은 나무들엔 번개가 내리꽂혀, 수십 개의 가지들이 산산이 부서져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무리 튼튼한 몸이라 해도 번개를 맞으면 크게 다칠 수밖에 없기에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속이 울렁거려….”

찌릿한 공기가 사방에 가득 퍼져 있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오는 듯했고, 도대체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 비늘과 피부가 저절로 긴장해 바짝 움츠러들었다.

앞으로 갈수록 찢겨진 대지와 드러난 나무뿌리, 여러 덩어리로 뭉쳐진 이름 모를 짐승들이 보였다. 찰랑, 찰랑. 그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듯했다.

과연 이 선택이 옳았을까, 계속해서 되뇌었다. 내가 죽게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미오리네 씨는 홀로 남겨지게 된다. 분명 돌아오지 못할 나를 끝없이 기다리며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의주를 찾을 실마리를 눈앞에 두고도 외면하는 건, 내게 너무나도 큰 후회를 남길 것 같았다.

“미오리네 씨….”

몇 년을 함께한 사이도 아니다. 오히려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건, 대체 왜일까? 고작 ‘처음 만난 동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 정도의 이유라면, 예전에도 수없이 봐온 짐승들과 다를 게 없다. 살기 위해 동족을 미끼로 삼거나, 아예 동족을 사냥하는 짐승들처럼.

어쩌면 나도 미오리네 씨처럼 용이 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기억을 되찾은 미오리네 씨라면 언젠가 나를 이무기에서 용으로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그런 막연한 기대. 어쩌면 그 치졸한 마음이 내 안 어딘가에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용이 되면 뭐가 그렇게 달라지는 거지? 용이 되면… 미오리네 씨가 나를 더 봐줄 것 같아서? 가족이라는 걸, 좀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이 세계에서 나 말고 또 다른 동질감을 얻고 싶어서? 미오리네 씨에게 여의주를 주겠다고 다짐했던 그 마음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지?
문득 움직임이 멈췄다. 매서운 바람이 붉은 비늘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가는 듯했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렁이던 무언가가 점차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

눈앞 하늘에, 푸른 벼락을 띤 무언가가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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